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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김달수 티엘아이 사장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입니다. 벤처 SoC업계의 대부로 통하는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의 다이내믹한 사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황 사장의 창업이야기 역시 엄청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을때 성공시대를 열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인터뷰였습니다.

황 사장이 추천한 106번째 릴레이인터뷰의 주인공은 최근 코스닥심사를 통과, 25일부터 주식거래가 시작되는 ㈜티엘아이(TLI) 김달수 사장입니다.

"아주 뛰어난 테크니컬 식견과 모범적 경영마인드를 가진 CEO입니다. LCD용 IC칩이라는 어려운 분야에 뛰어들어 마침내 시장 1위를 달리고 있는 전형적인 모험기업가입니다."

티엘아이 김달수 사장(46)이 어떤 테크니컬 안목과 모범적인 경영마인드를 갖고 있는지, 그의 9년에 걸친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불과 직원 34명이 세계 최고 수준의 TFT LCD패널용 핵심칩 기술하나로 연간 440억원의 매출에 111억원대의 단기순이익을 올린 알토란같은 반도체개발 벤처기업이 등장,화제다.

주인공은 최근 코스닥심사를 통과, 이달 25일부터 주식거래가 시작되는 LCD용 칩 타이밍컨트롤러(일명 T-Con) 개발회사인 티엘아이.

분당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서면 도무지 연간 400억원대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만큼 사무실공간이 자그마하다. 규모와 풍경만 봐서는 이제 갓 창업기를 넘긴 신생회사 모습그대로다.

창업자 김달수 사장은 매우 활달하고 자신감넘치는 CEO다. 적극적인 성격과 숨김없는 화술, 그리고 익살스러운 너스레로 상대방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솔직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매우 소탈한 성격이다. 한눈에도 역동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함을 느끼게 한다. 동안의 얼굴인데다, 40대 중반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에너지가 넘친다. 다부진 몸매와 강인한 눈매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왠만한 일에는 눈도 끔쩍않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전형적인 개발자출신 창업자. 20년넘게 한 우물만판 탓인지, 칩기술 트렌드와 시장추이에 관한한 탁월한 식견을 자랑한다. 9년차 CEO답게 시장과 향후 비전을 제시하는 말투의 행간에는 노련함과 신중함이 묻어난다. 지난 2년간의 수직 성장세와 최근 성공적인 기업공개탓인지, 김 사장은 의욕이 넘친다.

티엘아이는 TFT LCD패널용 타이밍컨트롤러 개발회사로 지난해 289억원, 올해 440억원의 매출에 순익 20%대가 넘는 유망 기술벤처기업.

타이밍컨트롤러는 TFT LCD를 통해 동영상을 구현할 때 각각의 주사선마다 순간적으로 화면색상에 필요한 색감을 뿌려주는데, 이때 색감을 수백분의 1초마다 자동으로 형형색색 뿌려지도록 컨트롤해주는 역할을 하는 IC칩.

LCD화면의 동영상 색상을 자동 조정, 정해진 색감이 나오도록 제어해주는 것. 워낙 최첨단 기술이라 전세계적으로 서너개 업체만이 개발하고 있을 정도. 티엘아이는 최근 기업공개를 통해 성공적으로 코스닥에 데뷰했다.

◆ 춤추는 고래가 된 반골기질의 천재

87년말, 입사 3년차인 김달수는 임원의 지시에 한동안 할말을 잊었다. 대리급인 자신에게 부장급 직책인 팀장을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

서울대 전자공학과 석사출신인 김달수는 85년 산학장학생출신으로 금성반도체에 입사, 반도체와 인연을 맺는다. 그가 처음 맡은 일은 공정설계. 반도체양산에 필요한 모든 공정을 최적화상태로 설계하는 업무. 이른바 PI(Process Integration)엔지니어로 불리는 직책이었다.

반도체회로설계를 전공했던 그는 말그대로 '난감'그 자체였다. 공정설계에 관한한 '백지상태'였기 때문. 하나도 모르는 처음 접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해결방식은 늘 무대포식 정면돌파형. 닥치는대로 파고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엄청난 '향학열'을 불태운다.

명문대 석사출신이라는 자부심도 크게 발동했다. 밤 12시넘어 사무실 책상밑에 쭈구려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일이 재미있어 허구한날 밤을 샜다. 관련된 책과 논문은 모조리 섭렵했다.

한달에 귀가한 날이 3일밖에 안되는 때도 있었을 정도로 그는 일에 푹 파묻혀 살았다. 고가의 최첨단 반도체장비를 접하면서 그는 미친듯이 일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PI 담당자는 개별소자설계는 물론, 각각의 공정을 꽤차고 있어야 한다. 삼성 LG 현대 등 국내 반도체산업계를 통틀어 내로라하는 특급 PI엔지니어가 손꼽을 정도로 희귀한 것도 이 때문.

어느정도 일에 미쳤는지는 그가 입사 1년만에 대리승진, 입사 3년차부터 팀장역을 맡은 것에서 쉽게 짐작할수 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초고속승진이었다. 89년, 김달수는 LG반도체 청주 D램공장이 설립되자, 청주로 내려간다.

그는 이때부터 엔지니어로써 '고수'반열에 오르기 시작한다. 김달수는 이미 밤낮없이 일하는 특유의 '집중력'과 물불가리지 않는 불도저식 문제해결능력을 보이며 경영진으로부터 일치감찌 '재목감'으로 지목돼온 '핵심인력'이었다.

청주공장은 달리는 김달수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다. D램생산라인과 수없는 최첨단 반도체장비들은 그를 흥분시키고 매료시켰다. 새로운 공정을 배우고 개발하면서 그는 엄청난 성취감과 함께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그야말로 '일중독자'란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PI엔지니어는 공정, 칩설계등 분야별 개발자를 모두 설득시킬줄 알아야 합니다. 전 분야를 두루 꽤차지 않으면 불가능하죠."

김달수는 89년부터 내리 6년간 PI업무에 전력투구한다.

그가 국내 손꼽히는 반도체전문가로 떠오른 것도 이때의 경험이 결정적 토대가 된다. 90년 12월, 김달수는 메모리 기술제휴사 일본 히다찌사에 2년간 기술연수를 떠난다. 히다찌가 신제품개발을 어떻게 진행하고, 팀별역할을 어떻게 조합하는 지를 어깨너머로 배울수 있었다.

귀국후인 93년 3월, 김달수는 드디어 D램설계실장을 맡아 메모리개발사업 전체를 진두지휘하게 된다. 초고속승진을 이어가던 그는 늘 회사경영진의 총애를 받는 '핵심인재'였다. 회사내 그의 입지는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였다. 그러다보니, 중요한 파트에는 늘 김달수가 있었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면서 김달수의 안목과 시야는 일취월장했다. 1메가D램에서부터 4메가, 64메가싱크 D램 등 핵심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형식적인 규율을 극도로 싫어했던 반골기질의 천재, 김달수는 이미 사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그가 처음 겪은 좌절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것은 바로 이른바 '64메가D램개발 프로젝트'였다.

◆ 그가 사표를 던진 이유

"히다찌 프로젝트를 찬성하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일이야."

97년 4월말, 김달수는 술에 취해 평소와 다르게 회사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회사일에 목숨을 걸었던 김달수는 이날 밤늦도록 격정을 토로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97년 봄,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개발미션이 떨어진다. 바로 2건의 64메가D램개발 프로젝트. 당시 회사는 64메가D램 상업화를 위해 LG반도체 연구소에서 개발한 것과 히다찌사와 공동개발한 것 두가지를 동시에 상업화하는 모험을 택했다.

기술종속에서 벗어나자는 전략이었다. 결과는 히다찌 프로젝트의 한판승.히다찌건은 성공한 반면, 자체 상용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참담한 결과였다. 경영진으로부터 처절한 질책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도 크게 상했다.

"설계가 끝난 일본제 칩소자를 들여와 만들다보니, 우리 기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경영진의 평가는 김달수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히다찌칩 상용화성공에 대해선 칭찬 일색이었고, 자체칩 실패는 "그럴줄 알았다"는 분위기였다. 자체 기술로 개발한 칩에 대한 경영진의 열정과 자존심이 싸늘히 식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존심 센 김달수에겐 큰 충격이었다.

청주공장에서 밤낮없이 보낸 7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97년 5월, 끝내 사표를 던졌다. 그해 9월, 우여곡절끝에 사표가 수리됐다. 막상 사표를 던졌지만, 구체적인 대안은 없었다. 그저 반도체관련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엔지니어로써의 자존심 때문에 곧바로 사표를 던진 열혈청년, 김달수. 그의 거칠고 격한 열정은 서서히 그를 사업가의 길로 빠르게 재촉하고 있었다.

◆ 홀로서기와 고난의 세월

"답은 회사를 새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큰 규모로 채무보증을 선 상황에서 이를 털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98년 가을, 김달수는 투자해준 주주사에 연대보증한 40억원 때문에 1년전 창업한 회사를 접어야하는 아픔을 겪는다.

김달수가 창업을 결행한 것은 97년 10월. 사업아이템도 정하기 전에 그가 먼저 한 일은 사람구하는 일. 6개월간 비메모리분야 전문가를 수소문했다. 아름아름 국내 손꼽히는 전문가를 찾아낸뒤, 무작정"“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놀라운 것은 삼성, 현대, LG에 근무하던 핵심엔지니어 6명이 사표를 던지고 합류한 것.

"사실 능력이 출중한데, 자기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좋은 인력, 좋은 환경만 제공하면 반드시 성공할 걸로 확신했다. 이때부터 김달수는 기업가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감각적으로 사업아이템을 찾아낸다.

그는 오랜 고민끝에 향후 모든 반도체에는 CPU가 꼭 필요할 것이고, 특히 메모리와 사람간의 인터페이스에 폭발적인 수요가 생겨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디지털녹음기시장이 올 것으로 보고, 메모리에 녹음할수 있는 칩개발에 착수했다.

개발막바지에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디지털녹음기 수요가 미미할 것같았다. 기능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97년말 당시는 인터넷을 통해 MP3파일이 유포되기 시작할 무렵.

MP3플레이어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접하곤,곧바로 MP3파일을 들을수 있는 칩개발에 착수했다. 즉 보이스및 MP3파일 디코딩기능을 넣은 칩을 개발한 것.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김달수의 놀라운 감각덕분에 티엘아이는 98년 국내 최초, 세계 3번째로 MP3디코딩 칩을 개발하는 개가를 올린다.

MP3파일 디코딩칩 설계에 성공했지만, 돈이 바닥났다. 이때부터 김달수의 저돌적인 경영스타일이 위력을 발휘한다. 타깃은 삼성전자. 전직장 LG반도체 대신 삼성전자를 택한 것은 전관예우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 기술로 정면승부를 걸었다.

김달수다운 결정이었다. 설계는 티엘아이, 생산과 판매는 삼성전자, 이익은 5대5로 나누자고 삼성전자에 제안했다. 예상을 깨고 그 다음날 삼성전자 담당과장이 분당사무실로 부리나케 찾아왔다. MP3파일 리코딩칩은 그만큼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급한 사안이었던 것.

하지만 삼성전자는 협력사와 런닝로열티 계약을 한 적이 없으니 개발용역비를 주겠다고 통보했다. 김 사장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바로 'No'라고 답변했다.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밀어부쳤다.

결과는 TLI의 한판승. 놀랍게도 삼성전자와의 계약은 티엘아이의 요구를 100%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났다. 칩성능이 어느정도 뛰어난지 짐작할수 있는 대목. 김 사장의 두둑한 베짱 영업스타일을 엿볼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간 개발용역 등으로 근근히 버텨온 티엘아이는 99년말부터 삼성전자를 통해 100만개의 칩을 판매, 20여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2000년 10월, 액면가의 10배수로 16억원의 투자유치에도 성공했다. 회사는 한껏 고무되기 시작한다.

MP3플레이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 확실시 되는데다, 삼성전자라는 큰 고객을 확보한 상황이라 김 사장은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곧바로 확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부메랑처럼 곧바로 위기가 되어 목을 죄었다. 순식간이었다.

◆ CEO의 고해성사, 혼이 깃든 Bottom Up 세일즈를 아세요?

"200만원이면 직원들 삽겹살 회식을 열번은 할수 있는 돈인데…."

99년초, 김달수는 월급날을 앞두고 거래처 대금결제요청을 위한 술접대후 귀가하는 택시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핑돌았다.

늘 급여줄 돈이 없어 쩔쩔맸지만, 거금 200만원을 들여 술접대를 하면서까지 결제를 독촉해야하는 현실앞에 김 사장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수 없었다.

98년 여름부터 1년 6개월간, 김달수는 늘 월급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급여주고 나면 통장잔고는 항상 100만원남짓. 아무 생각없이 일주일을 살다보면 또 월급날이 코앞이다. 급여를 주지 못하는 사장은 사장이 아니라는 생각에 잠못이루는 밤은 그렇게 1년 6개월간 이어졌다.

김 사장은 자금운영방식에 관한한 매우 철저하다. 처절한 '배고픔'과 눈물젖은 빵을 먹어봤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모든 직원이 이 고비만 넘기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다는 확신하나로 똘똘 뭉쳤죠."

그 이후 터진 삼성전자 계약건과 16억원의 투자유치는 그야말로 가뭄속의 단비였다. 자신감을 얻은 김 사장은 이때부터 확장경영에 나선다. 2001년, 서울 가락동에 위치한 벤처타운에 600평규모의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얻고 직원은 48명까지 늘렸다.

두번째 위기가 닥쳤다. 2001년, 삼성전자와의 계약건이 흐지부지 종료된 것. 설상가상으로 수요는 정체상태인데, 경쟁사가 늘면서 칩가격이 연일 뚝뚝 떨어진 것.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달수의 승부사적 기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2002년, 김달수는 사업아이템 자체를 바꾸는 대결단을 내린다. 새로 창업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업전환이었다. 주력제품을 디지털오디오에서 LCD등 디스플레이IC칩으로 바꾼 것.

사무실을 1/3 수준으로 줄이고 직원수도 48명에서 무려 13명으로 줄였다. 좋은 인력을 내보내야하는 상황에선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2002년 LCD용 IC 개발에 착수한 김 사장은 또한번의 뼈아픈 패착에 몸서리를 친다.

사건은 LCD용 IC칩을 LG필립스LCD에 납품하고 있는 미 실리콘이미지사와 기술라이선스계약을 맺은후 터졌다. 고객인 LG필립스LCD가 100% 환영할 것으로 확신했지만, 치명적인 패착이었다.

실리콘이미지에 대한 LG필립스LCD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 외국계 기업특유의 도도함과 느려터진 업무스타일탓에 짤리기 일보직전이었다.결국 영업시간을 단축할 속셈으로 라이선스계약을 맺었던 김 사장은 오히려 독자적으로 칩을 개발, 공급할 때 훨씬 많은 비용과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급기야 티엘아이 단독으로 LCD용 IC칩을 독자 개발, 납품하기에 이른다. 물론 로열티는 꼬박꼬박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그의 사업변신은 시장상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2003년 LG필립스LCD에 처음으로 납품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LG필립스를 뚫기위해 철저히 밑바닥부터 다지는 'Bottom Up'방식을 고집했다. LG필립스 하면 팀장급이나 임원급 대부분 알지만, 절대 윗선을 찾지않았다. 대신 생산라인의 실무자부터 감동시키는 밑바닥작전에 올인했다.

"담당자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절대 오래갈수 없습니다. 물론 윗선을 타고 낙하산 납품할수도 있지만, 품질로 실무자를 감동시키는 게 핵심이라 판단했습니다."

바닥영업을 고집한 것은 개발자출신 김 사장이 겪었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문전박대는 이루 헤아릴수 없었다. 계속 부딪혔다. 2003년, 납품이 터진이후 개발,구매, 생산 등 주요 분야 담당자들이 모두 만족하기 시작했다. 이에 힙입어 2004년에는 63억원어치를 납품하는데 성공했다.

여세를 몰아 2005년에는 그간 세계 1위 LCD업체인 LG필립스를 독식해온 미 TI,NS 등을 제치고 1위 공급업체로 올라섰다. 2005년에는 매출이 289억원으로 수직 상승한데 이어, 올해는 440억원이 예상되는 등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사업이 탄력을 받자, 투자 제의도 이어졌다. 2005년에는 미국 인텔캐피탈 등으로부터 92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김달수, 그는 누구인가
60년생. 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사(79학번), 석사출신. LG반도체 D램팀장, D램설계실장 역임. 반도체설계에서부터 공정설계까지를 총괄하는 국내 손꼽히는 PI엔지니어출신. 직선적이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 뛰어난 기술적 감각과 불도저같은 강한 추진력이 강점.뛰어난 친화력으로 팹리스 반도체업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취 미골프(핸디 16)
운동 못하는 운동이 없을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
존경하는 CEO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무에서 유를 창조한 열정과 추진력은 모든 CEO들이 동경하는 경영자적 능력이다)
친한 IT맨1박창일 INC테크 사장, 박희복 매크로영상기술 사장, 황기수 코아로직 사장, 고범규 인티그란트테크놀로지즈 사장
감명깊게 읽은 책CEO와 성직자(로버트카텔외 지음)
10년후 모습1은퇴해있을 것이다.

◆ 김달수의 성공론, 그리고 꿈

성공반열에 오른 김 사장은 어떤 방법으로 비즈니스모델을 찾아냈을까? 그의 비즈니스모델 찾기(Developing)의 노하우를 알아보자. 우선 절대 유행을 쫓지 말란다.

"시장이 크다고 해서, 너도 나도 뛰어들었다가 망한 회사가 엄청 많습니다.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개념은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두번째는 차별화 요인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수많은 회사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은 차별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차별화가 핵심입니다."

창업 9년차 김달수의 성공론을 들어보자. 김 사장이 제시하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인재론'. "비즈니스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뛰어나고 좋은 사람을 영입할줄 알아야 합니다. 인재를 중시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남을 인정해주는 자세가 필요하단다. 사장도 직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직책일뿐이라는게 그의 설명. 가급적 상하관계가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설명.

두번째는 삶을 즐길줄 알아야한다는 '유유자적론'을 제시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합니다. 즐기면서 일하고, 삶을 즐길줄 알아야 합니다. 일만 해서는 안됩니다. 놀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즐기면서 하면, 뭐든지 그 분야의 '도사'가 된다는 게 그의 설명. "축구도 좋아서 하면, 프로구단 모든 선수의 신상을 꿰차는 전문가가 됩니다. 하지만 호구지책으로 하면 발전이 없죠. 즐기면서 일하는 친구들이 훨씬 빠르게 발전합니다."

김 사장이 제시하는 성공론의 세번째 팁은 '조직관리'.

"가장 어려운 것중의 하나가 조직관리입니다. 문제는 직원과의 교감입니다." 그는 자유방임형을 고집한다.

스스로 반골기질이 강했던 그는 과거 직장생활 경험을 토대로 직접적인 관리 대신 자유방임형을 고집한다. 어떤 것으로도 직원들을 강제하지 않는다.질책성 질문은 절대 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

다만 결과로 평가하고, 결과가 미흡하면 철저히 질책한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연봉으로 잡을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더 많은 연봉을 주는 회사가 있으면 바로 옮기죠. 가장 좋은 관리는 자율입니다."

삶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게 해야한다는게 그의 지론.요즘 그의 고민은 장기비전. 어떻게 회사를 장기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해답은 '차별화'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남들이 다하는 것은 기술이 아닙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독창적인 차별화요인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경쟁력이죠."

김 사장의 꿈은 티엘아이를 세계적 '디스플레이 토탈 반도체 공급회사'로 발돋음시키는 것. 벌써 중국을 비롯해 수개 LCD업체에 조만간 공급을 개시한다. 상황이 많이 좋아진 지금이 더 두렵단다.

예전에는 활주로를 달리고 있었지만, 이젠 활주로를 이륙, 비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란다. "이젠 멈출수가 없습니다. 안전고도까지 올라가기 위해선 아직 멀었죠. 이젠 떨어지면 모두가 죽습니다. 안전고도에 오르기까지 끝없이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2억원의 종자돈으로, TFT LCD용 핵심칩 국산화에 도전한 김달수 사장,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전형적인 벤처창업가였다.

그는 세계 1위 TFT LCD업체 LG필립스에 머물지 않고 이젠 세계 시장제패를 위해 다시한번 열정을 쏟고있는 지칠줄 모르는 모험기업가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 사장의 성공비결은 스스로 에너지와 열정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듯했습니다. 스포츠와 잡기를 통해 스스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자인 듯했습니다. 김 사장은 직원들에게 늘 서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고객사에 대해 늘 감사하는 '보은'을 강조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부 등을 통해 덕을 많이 베풀고, 또 이를 통해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생기는 것이 즐거운 삶이라고 하네요. 그는 진정한 프로였습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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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엘아이,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98년 10월
자본금25억원
직원수34명
연락처031)784-6800 www.tli.co.kr
사업내역 TFT LCD패널용 드라이버 IC,OLED용 드라이버IC
경영계획디스플레이용 토탈반도체개발회사
매출목표 440억원(2006년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