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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김기영 티쓰리엔터테인먼트 사장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코너입니다. 드래곤플라이 박철우 사장의 게임사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게임산업의 특징중 하나는 영화산업처럼 성패의 명암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점입니다. 늘 결과는 '모 아니면 도'죠. 투자리스크가 매우 큰 산업입니다.

그러다보니, 수십억, 수 백억원대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붓고도 보기좋게 참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임회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게임사 CEO들은 그래서 늘 살떨리는 '외줄타기' 심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박철우 사장이 추천한 125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댄스게임 '오디션'으로 일약 세계적 게임회사로 발돋음한 티쓰리엔터테인먼트 김기영(37) 사장입니다.

"김기영 대표는 정말 맨주먹에 열정하나로 유를 창조한 성공 벤처기업가의 전형입니다. 정말 집념 하나는 대단한 CEO입니다."

두 사람은 사업초창기 테크노마트에 입주해 일하면서 만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업상 어려움을 서로 터놓고 얘기할 정도로 절친한 선후배사이라고 합니다.

티쓰리엔터테인먼트(이하 티쓰리) 김기영 사장이 얼마나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인지, 그의 외줄타기 게임사업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티쓰리가 주인공. 특히 올해 기업공개에 나서기로 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창업자 김기영 사장은 온갖 고생끝에 29살에 창업, 10년만에 수백억원대의 부와 명예를 일궈내면서 다시 한번 억척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기영 사장은 큰 얼굴과 부리부리한 쌍꺼풀진 눈매, 다부진 체격이 인상적이다. 한눈에도 우직하고 뚝심을 느끼게 한다. 다부진 외모와는 달리 김 사장은 깜찍한 귀걸이를 할만큼 신세대다.

김 사장은 게임업계에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남다른 열정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있다. 20대 초반 바닥인생을 살며 척박하게 젊은 시절을 보낸탓에 왠만한 고생은 고생으로 생각지도 않을만큼 생존본능이 강하다.

올해로 창업 10년차. 나이에 비해 매우 노련한 경영수완을 자랑한다. 김 사장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오랜 밑바닥생활 탓에, 그의 경영스타일은 매우 실전적이다.

어떻게 돈을 벌고, 관리해야 하는지, 그는 돈버는 일에 관한한 동물적 감각을 자랑할만큼 실전형 노하우를 자랑한다. 티쓰리는 99년 설립된 PC게임,모바일게임, 온라인게임개발회사.

2005년 유명한 댄스게임 '오디션'으로 일약 세계적 게임회사로 발돋음했다. 2006년 150억원의 매출에서 지난해 320억원, 올해는 600억원대의 매출은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는 유망주다. 올해 기업공개에 나선다.

◆ 봉천동 옥탑방의 역사

"국내 최초로 삼국지게임을 만들어 승부를 거는거야."

99년 1월초, 봉천동 허름한 건물의 옥탑방. 김기영은 갓 게임학원을 마친 20대초반의 개발자 3명과 머리를 맞대고, 삼국지 게임에 대해 난상토론을 하고 있었다.

김기영은 7년여간 직장생활을 하며 한푼두푼 모아둔 2천만원으로 스물아홉의 나이에 겁도 없이 게임회사를 설립했다.

사실 창업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다니던 게임유통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결행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사업가로서의 열망이 너무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돈벌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수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기영에게 삶은 힘든 '생존'이었다.

옥탑방 사무실, 반지하 월셋방에 겨우 몸을 눕히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날아갈것만 같았다. 김기영은 사업이 얼마나 혹독한지, 곧 닥칠 처절한 실패의 고통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 찌든 가난은 김기영을 더욱 강하게 채찍했고, '절대빈곤'도 그저 조금 불편한 정도로 생각할만큼 그는 강인한 생활력을 갖고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육성회비가 밀려 늘 선생님한테 독촉받으며 학교를 다닐만큼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중학교시절부터 돈벌겠다는 생각에 늘 경영서적을 탐독했다.

고교를 다닐수 없었던 그는 검정고시 출신이다. 우여곡절끝에 대학에 입학했지만,역시 학비문제로 중퇴를 하고만다. 20대 초반, 김기영은 많은 방황을 거듭한다.

92년초, 20대초반의 김기영은 상선을 타면 돈도 벌고, 군면제혜택이 주어진다는 말에 '배'를 타기로 작심한다. 이른바 유조선 선원생활을 시작한 것.

망망대해를 헤치는 유조건의 갑판을 정리하는 거친 허드렛일이었다. 중동,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을 거치며 1년간 지구 곳곳을 돌아다녔다. 1년만에 그만두고 이어진 자동차 외판원 생활.

남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내성적 성격의 김기영. 아무 사무실이고 닥치는대로 들어가야하는 세일즈맨. 문앞에서 몇십번을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자동차 세일즈하면서 성격이 외향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영업이 이런거구나 많이 배웠죠." 선원, 자동차 세일즈 등 더운밥 찬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던 김기영은 젊은 시절, 돈벌기위해 닥치는대로 일했다.

이어진 무역회사도 그의 꿈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과연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게 뭘까?"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평소 게임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기영은 게임을 떠올린다. 97년, 김기영은 대만계 게임회사인 소프트월드 한국지사에 입사한다. 그는 운명처럼 게임유통시장에 뛰어든다.

◆ 밑빠진 독, 그리고 처가살이

"여보, 처가집으로 들어갑시다. 내가 꼭 2년안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해주께."

2003년 겨울, 김기영은 왕십리 아파트 월세보증금 6천만원을 빼내 회사통장에 입금한다. 그리곤 처가집에 얹혀사는 '처가살이'를 강행한다.

'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한다'지만, 김기영은 마지막 종자돈을 사업밑천에 쓸요량으로 처가살이를 자처한다. 남편, 사위로서의 체면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그가 선택할수 있는 최후의 카드는 월세보증금 6천만원이 전부였다. 친구도 별로 없고,남에게 손벌리는 것도, 피해주는 것도 무척 싫어했던 김기영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존심'뿐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새벽 6시 미아리 처가집을 나서, 새벽 1시에 들어가는 올빼미생활을 2년간 지속한다. 장인 장모 얼굴 부딪히지 않으려면 어쩔수 없었다. 사업가로 변신한 김기영의 자금난은 이미 예상된 수순이었다.

말이 개발자지, 이제 갓 게임학원을 나온 친구들의 실력으로 삼국지 게임을 만들어보겠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 지지고 볶고, 바람잘날 없었다. 결국 1년만에 포기했다. 개발은 실패했고, 돈은 떨어지고. 개발자들은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김 사장은 '투잡스족' 생활을 이어가면서 근근히 연명했다. 게임개발과는 별도로 게임수입 유통업을 계속하면서 운영비를 벌었던 것. 창업직전 대만계 게임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일하며 PC게임 전국 영업망을 구축하는 일을 했었다.

전국을 돌며 게임 유통에 나섰던 김기영은 게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청운의 꿈을 품고 99년 1월 창업에 나섰던 김기영. 그는 이때부터 생과 사를 넘나드는 혹독한 시련을 겪기 시작한다.

물론 이런 시련을 통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CEO로써 탄탄한 내공을 하나씩 쌓아가게 된다.

자본금 2천만원은 금새 바닥이 났고,사업아이템은 결국 접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김기영은 가장 쉬윈 게임을 개발키로 마음먹는다. 2000년 12월, 회사설립 2년만에 아동용 게임 '보보와 친구들'을 출시했다. 풍선을 때리고 쏘는 단순한 게임이었다.

당시만 해도 PC게임 매출은 카피당 몇천원을 받는 수준. 새벽 서너시까지 게임 수입업무에 매달리고, 낮에는 개발에 몰무하는 투잡스 생활을 2년가까이 하고있지만, 자금은 항상 부족해 늘 10여장의 신용카드로 매달 돌려막아야 했다.

◆ 김기영의 처절한 승부수

"오빠, 열심히 했는데, 정말 하늘이 너무 원망스러워." 2003년 늦여름, 김기영은 일을 돕던 여동생의 울먹이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르며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여동생은 자신의 신용카드까지 돌려막기를 하며 회사 운영자금을 대다가 카드빚에 몰려 신용불량자가 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여동생에게 까지 경제적 고통을 안겨준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생각된 적이 없었다.

게임사업을 시작한게 천추의 한이었다. 밑빠진 독이었다. 왜 이렇게 힘들고 답이 나오지 않는 게임사업에 뛰어들었는지, 수십번 후회했다.

수틀리면 바로 사표를 던지는 개발자와 뭐하나 제대로 마무리가 되지 않는 개발상황에 넌더리가 났다. 사람도 싫고, 모든게 싫었다.

포털사이트와 계약, 게임개발에 나섰지만, 실패의 연속이었다. 늘 프로그래머가 문제였다. 개발일정은 항상 늘어졌고, 프로그래머들의 잦은 퇴사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할수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6천만원은 전재산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만약 6천만원을 날리면 재기는 불가능할 거라 판단했습니다." 잠을 이룰수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마지막 6천만원을 시드머니로 무역업을 재개, 안정되게 돈벌어 빚을 갚는게 정답이었다. 무역업은 이미 했던 거라 작지만 금새 돈을 벌수 있었다.

4억원이 넘는 정책자금 차입금, 각종 공과금 연체로 인해 사무실집기에 대한 압류통보를 받은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 동생이 울먹이는데, 정말 마음이 짠해지면서 눈물이 핑돌더라구요."

하지만 한번 끝까지 해보자는 여동생의 제안에 김 사장은 마음을 돌려먹는다.마음을 다잡았다. 가족 전체의 운명이 달린 일이었다. 언제 게임개발을 완료할지 확신은 없었지만, 다시 올인하기로 했다. 그것은 '오기'였다.

"돌아갈 길이 없으니, 그저 앞만보고 내달릴수밖에 없었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개발해 팔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죠."

"사장님 돈 없으면 게임만들지 마세요"라고 쏘아부치며 떠나는 개발자들의 핀잔은 그에겐 더없이 좋은 자극제가 됐다.

울분을 토하며 수도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젊음을 다 바쳐가는데,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했습니다. 갑자기 내가 과연 모든 걸 다 걸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모든 걸 걸기로 마음먹는다. 마지막 남은 월세보증금과 모든 것을 쏟아붓는 승부수를 던진다. 실패를 맛보며 처절하게 배수진을 친 김기영은 그렇게 스스로 추스리며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기영,그는 누구인가
71년생, 부산생. 외국계 게임회사 한국지사에서 PC게임유통업을 해온 게임유통전문가. 창업 10년차의 게임산업계 1.5세대 CEO. 강인한 추진력과 완력의 소유자. 2005년 댄스게임 ‘오디션’의 대성공으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국내 게임업계 글로벌 CEO의 선두주자.
취미야구(회사내 야구동호회멤버로 활동중) 골프는 안함
존경하는 CEO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친한 IT맨박철우 드래곤플라이 사장,김남철 예당온라인 사장,권준모 넥슨 사장
감명깊에 읽은 책Good To Great(짐콜린스 著)
10년후 모습글로벌사업하고 있을 것이다.능력의 한도까지 끝까지 가보고 싶다

◆ 불후의 명작,오디션의 탄생

"그래, 춤장르가 없네? 온라인 댄스게임? 얘기될 것같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어."

2003년초, 김기영은 우연히 댄스게임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6개월째 시장에 없는 게임이면서도 흥행성이 있는 분야가 없을까 고민해온 김기영은 '춤' 장르의 게임을 떠올리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일본에 몇 개 있었지만,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패션과 음악, 댄스 요소를 가미하면 승산이 있을 걸로 확신했다. 곧바로 개발에 착수했다. 문제는 자금과의 전쟁.

신용카드 돌려막기, 월세보증금, 차입 등 모든 것을 동원했다. 이미 '보보와 친구들'의 대만수출, 모바일게임 'YMCA야구단', '천하일품 요리왕', '짱파이터 현상태' 등 PC게임과 모바일게임을 잇따라 개발, 서비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출은 보잘 것 없었다. 2003년봄, '오디션' 게임개발에 착수한 김 사장은 우여곡절끝에 1년여만에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사장님, 동접자(동시접속자)가 500명도 채안되는데 무슨 유료화예요? 유료화를 할려면 동접이 1만명은 안되더라도 최소 5천명은 돼야 합니다."

2005년 6월, 김기영은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비스 개시와 거의 동시에 댄스게임 '오디션'의 유료화에 들어갔다. 동접자수는 불과 450명수준. 통상 동접 1만명을 넘어선후 유료화하는 업계 관례에 비추어볼 때 티쓰리의 유료화는 그야말로 '난센스'였다. 없는 손님 쫓아내 스스로 '무덤파는' 격이었다.

"찬밥 더운밥 가릴때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숨넘어가는데, 5천명, 1만명을 어떻게 기다립니까? 다들 정신나갔다고 했죠." 상황은 절박했다. 그에게 적정 동접자수는 먼나라 얘기였고, 당장 몇백만원의 매출을 만들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유료아이템은 댄스캐릭터에 입힐 옷이나 장식품 등이었다. 믿을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동접 450명에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저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매출은 금새 월 7천만원선으로 올라섰고, 2005년 연말에는 동접자수 1만명을 돌파,그해 불과 6개월만에 연매출 20억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처음부터 유료화한 게임으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대박행진이었다.

오디션은 특히 여성이용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전체 이용자의 60%가 20대 여성. 단일게임으로 여성 이용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독특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게임시장에 여성고객을 대거 끌어들인 첫 사례를 기록했다.

이례적으로 매주 게임을 업데이트하자, 유저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1년에 한두 차례 업데이트하는 기존 온라인게임과 달리 김 사장은 유료오픈후 매주 업데이트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고수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직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밤낮없이 업데이트에 매달렸다.

"와, 그때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 시간 돈이 쌓이는 데,정말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울며겨자먹기로 유료화 했는데, 반응이 그렇게 뜨거울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거든요."

오디션은 서비스개시 첫해 20억원, 다음해에는 150억원, 지난해는 32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파죽지세의 성장세를 이어갔다.

오디션은 특유의 섬세한 재미로 여성 게임마니아들을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2005년 9월, 예당온라인과 퍼블리싱계약에 사인,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마련한다.

퍼블리싱계약금 8억원과 유료화매출로 회사는 곧바로 안정적인 유동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예당쪽도 탈탈 털어 8억원을 마련한 것이었더라구요. 저희 입장에서도 2년간의 운영자금 규모였습니다. 좋은 윈윈 계약이 됐습니다."

2005년말, 김기영은 그 지긋지긋한 자금난에서 벗어난다. 빚도 갚고, 처가살이도 면할수 있게 됐다. 사업한지 7년여만에 자금난과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매달 직원월급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불어나는 통장잔고를 바라보며 김기영은 하루에도 몇번이고 스멀스멀 번지는 미소를 감출수가 없었다.

◆ 오디션의 질주

오디션은 국내보다 해외서 더 유명한 게임이다. 오디션은 2005년 7월 중국 서비스를 개시한 이래 중국내 회원 1억5천만명, 동접자수 80만명을 기록중이다.

한국산 캐주얼게임으로는 오디션과 카트라이더가 늘 1, 2위를 엎치락덮치락한다. 중국 현지 파트너사의 월 매출규모만도 80억원대에 이른다.

오디션은 중국에 이어 대만, 말레이시아, 브라질, 일본, 미국, 필리핀, 태국, 영국 등 전세계 20여개국에서 현지 서비스중이며, 10개국에서 상위 10위권에 랭크돼있을만큼 글로벌 인기게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티쓰리는 월 매출 50억원의 절반인 25억원 규모를 해외에서 거둬들이고 있다. 김 사장은 올해부터 해외 라이센싱방식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에 지사를 설립, 직접 현지 서비스에 나선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총 7개국에서 직접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현재 진행중인 9개 신규 게임프로젝트도 순차적으로 오픈할 계획. 올해를 기점으로 국내 게임 빅 5에 본격적으로 도전한다는 야심찬 전략도 세워놓고 있다.

오디션의 질주는 향후 5년간 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오디션의 대성공은 여성이용자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꿰뚫었기 때문이다. "음악과 패션,커뮤니티가 잘 어울어진 것이 오디션성공의 핵심요입니다."

특히 20대 여성이용자들은 유료화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낮아 오디션 성공의 또다른 요인으로 분석된다. "전세계 20개국 '오디션' 이용자의 60%가 여성입니다. 결제금액도 가장 큽니다."

◆ 김기영의 성공론

"사업요? 다시 하라고 하면 안할 겁니다. 정말 못할 것같습니다." 10년전이라는 가정에 김 사장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이젠 예전에 했던 치명적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단다.

"게임사업하면서 힘든 점은 절대 정해놓은 날짜에 게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두번째는 수많은 사람, 상황과 적절히 타협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다르단다. 이제는 절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고백한다. "이제 비슷비슷한 게임은 누구나 개발할수 있습니다.새로운 재미, 창조적인 기획력이 핵심입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나오죠."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이제는 개발환경과 사람과의 관계에 절대 휘둘리지 않고,모든 것을 시스템적으로 관리한다.

그의 성공론이 궁금하다. "전 힘들 때 과연 내가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는가를 반복적으로 질문합니다. 죽을만큼 했는가 반문하다보면 힘이 솟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에너지를 성공의 첫번째 요인으로 꼽는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

두번째는 ‘행동론'. "이거다 싶으면 바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생각에만 빠져있으면 안됩니다. 계획이 나빠도 행동이 빠르면 해결할수 있습니다." 다혈질인 김 사장은 급한 성격만큼이나 행동이 앞선 스타일이다.

그는 늘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빠른 의사결정으로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그는 직원들에게 늘 '도전'을 주문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래도 일이 안되면 쏟아붓는게 적어서 그런거죠."

티쓰리엔터테인먼트 김기영 사장. 그는 창업 10년만에 직원수 4명짜리 게임개발사를 전세계 20여개국을 누비는 글로벌 게임회사로 키워낸 글로벌 CEO로 우뚝 서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기영 사장은 앞으로도 회사의 글로벌사업 규모를 키우는 일에만 몰두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아파트를 얻어 처가살이를 벗어난후 사람대접을 받기 시작해 더 힘이 난다고 합니다. (기여도가 높은)직원들에게 집한채씩은 책임지겠다고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킬 생각이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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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쓰리엔터테인먼트,어떤 회사인가
설립일99년 1월
직원수300명
연락처 www.t3.co.kr
사업영역모바일게임,온라인게임,콘솔게임 등 게임전문개발사
경영목표 2008년 기업공개, 세계 게임업계 글로벌 빅 5사로 발돋음
매출목표600억원(2008년 추정치)